비자법이 발동시키는 오래된 각본
Banerjee, P. (2022). The opportunity trap: High-skilled workers, Indian families, and the failures of the dependent visa program. In The Opportunity Trap. New York University Press.
일하면 안 되는 비자가 있다. H-1B로 미국에 온 외국인 인력의 배우자에게 주어지는 H-4가 그렇다.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없는 비자. 사회학자 Banerjee의 The Opportunity Trap은 이 비자에 묶인 인도인 부부 55쌍을 인터뷰한다.
연구의 설계가 영리하다. 한쪽은 IT에서 일하는 남편과 H-4에 묶인 아내, 다른 한쪽은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와 부양 대상이 된 남편이다. 그런데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.
경제적으로 부양받게 된 아내들은 대개 본국에서 학위와 커리어가 있던 사람들이다. 미국에 와서 그 직업적 자아가 통째로 지워진다.
집 안에 갇히고, 계좌도 면허도 남편을 거쳐야 만들 수 있고, 사회적으로는 투명인간이 된다. 그들은 자기 비자를 vegetable visa, prison visa라고 불렀다.
간호사 아내를 따라온 남편들은 남성 생계부양자라는 사회적 각본이 무너지는 남성성의 위기를 겪는다. H-4를 받은 여성 배우자들의 경우와는 달리, 다수의 H-4 남편들은 집안일과 육아를 전담하기를 거부한다. 많은 H1-B 여성 가장들이 외벌이와 가사일을 동시에 담당하며 남편의 기분을 살핀다.
미국 비자법은 성별에 대한 내용을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. 그런데 그 법이 작동하는 순간, 생계부양자와 부양가족이라는 오래된 성별 각본이 발동된다. 집 안의 노동 분업과 부부 관계는 문화적 진공에서 쓰여지지 않기 때문이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