박사논문이 정의하는 다섯 해
사실 학위논문 주제를 잡을 때 빅 픽쳐가 없었다. 석사논문 주제를 잡을 때도, 박사논문 주제를 잡을 때도. 그냥 평소 연구 관심사를 “실현가능한 프로젝트”로 만드는 데만 힘을 쏟았다.
몇 년 안에 끝낼 수 있을까? 데이터는 구할 수 있을까? 오랫동안 잡고 있어도 지겹지 않을까? 이런 것들만 생각했다.
그런데 박사논문을 쓰고 졸업하니까, 그게 얼리 커리어 시기의 내 학자적 정체성이 되더라. 단독저자 논문 세 편을 거기서 낸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.
학회에 가면 XX 주제를 하는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한다. 교수 지원할 때 research statement도 여기서 출발한다. 그랜트 프로포절 쓸 때도 이 주제를 중심으로 확장해나간다.
박사논문은 단순한 졸업 요건이 아니었다. 앞으로 5-10년간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출발점이었다.
다행히 크게 깊은 생각하면서 정한 주제는 아니었는데도 일관성도 있고, 큰 그림도 있고, 후속 연구 아이디어도 많이 나오고 있다.
어찌보면 운이 좋았다.
하지만 만약 그때 이런 걸 알았더라면? 박사논문 주제가 이렇게 중요한 선택이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더 신중하게 접근했을 것이다.
단순히 “실행가능한가?“만 묻지 않고 이런 질문들도 했을 것이다.
- 이 주제에서 파생될 수 있는 다른 연구들은 뭐가 있을까?
- 이 주제로 5-10년간 연구할 수 있을까?
- 이 분야에서 나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?
지금 박사논문 주제를 고민하는 후배들에게는 이런 얘기를 해준다. 물론 졸업 계획도 중요하지만,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장기적 비전이라고.
박사논문은 당신이 학계에서 처음으로 내세우는 나만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. 졸업 후 최소 5년간은 그 이야기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게 될 것이다.